成均進士竹溪公諱載鉉行狀 님(府君)의 이름(諱)은 재현(載鉉)이요 자(字)는 자정(子鼎)이요 호(號)는 죽계(竹溪)이시다. 진(晉)나라 혜제十二년에 먼 조상이산 아찬공(阿餐公=휘瑞)께서 신라고 사신을 나오시매 교동백(喬桐伯)이 되셨으니 우리나라에서 印氏가 있음이 이로부터 비롯되었고 고려때와 이조초에 이르러서도 대대로 훌륭하신 분들께서 계시였었다. 증조의 이름은 정화(廷華)요 조부의 이름은 흡(熻)이요 아버지의 이름은 두규(斗圭)이시다. 큰어머니는 안동김씨니 만수(萬壽)의 따님이요 후취 어머니는 예천임씨(醴泉林氏)시니 만현(萬賢)의 따님으로 임씨께서 공(公)을 낳으셨다. 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이함이 비범하였고 마음씀과 글지음이 훤하셨다. 八세에 글을 짓기를 『보검(칼)은 마침내 갑(匣)속에서 나오고 고목(枯木)도 또한 꽃이 피도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세에 소학책을 읽으매 남들에게 일러서 말하기를 “사람이 되는 도리가 여기에 쓰여 있으므로 옛 분들은 나이 겨우 八세에 소학에 입학하였는데 내가 지금 十세에야 비로소 읽게 되니 어느 때에 가히 사람이 되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손수 전질(全帙)을 베껴서 주야로 보고 외우기를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않았고 항상 행동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소학책의 말들을 생각하여 입으로는 업신여기거나 거만한 말이 없었고 몸으로는 희롱하며 놀지 않으사 어른과 다름이 없으시니 사람들이 그 엄연함을 보매 감히 아이로써 쉽게 대하지 못하였다. 고조 학생공께서 가훈이 심히 엄하시매 님께서 비록 밖에 나가 공부(負笈)하되 돌아오면 반드시 공부한 것을 내놓게 되었다. 소시(少時)에 아산 백연암(白蓮菴)에서 많이 공부하셨는데 항상 스스로 경계하시길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함은 공부를 잘함과 같음이 없다”고 하면서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기를 조금도 태만히 않고 힘써 부지런히 하였다. 섣달그믐에 어버이를 찾아뵙고 무릎을 꿇어 공부한 것을 외우고 경서의 뜻을 강론(講論)하매 고조부님(필자의 고조:즉 載鉉씨의 아버님)의 안색이 기뻐하사 물러가라고 명령하신 후라야 이에 물러 나오셨다. 어느 해 여름에는 공부를 온양 사람의 집에 가서 하였는데 八월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때마침 장마가 열흘이 넘게 되어 가을 홍수가 났는데 큰 내를 건너시다가 지으신 시편(詩藁)을 모두 떠내려 보내게 되었는데 님께서는 한지(束楮)를 사서는 모두 외어서 쓰시매 한자도 빠뜨리지 않으시니 아버님 학생공께서 시회(詩會)를 한다는 것을 듣고 님께서 굵은 베옷과 헤어진 짚신을 신고 사 기었다. 모든 사람이 냉대한지 四~五일이 지났는데 진사 강유영(上舍姜幼寧)이 님의 글을 보고는 책상을 치면서 놀래고 탄식하기를 옛말에 집안에 명사가 있음을 三十년이나 알지를 못하였다고 하더니 정히 이는 나를 두고 한 말이라 제군들은 마땅히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라고 하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고쳐 존경하였다 한다. 면천의 아미산(蛾嵋山) 양지 바른 곳에 선친의 초가(弊廬)가 있었는데 님께서는 여기에서 세상에 자취를 감추고 문을 닫고 독서하셨는데 하루는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서 온 마을이 인적마저 고요하였다. 이때에 이존수(相公李存秀)가 호서지방의 암행어사(繡衣)가 되어서 온 고을에 민정을 살피다가 님의 명성을 듣고 마부(馬夫)도 물리치고 몸소 찾아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는데 사서삼경과 역사들을 모두 통달함을 보고 조용히 님에게 이르기를“내가 아들이 있으나 가히 의탁하여 가르칠 곳이 없었는데 이제 선생을 보니 가히 나의 아들을 맡길 만하다”고 하니 님께서 말하기를 “시골의 하찮은 선비가 무슨 식견이 있어서 공의 자질(子姪)을 가르치겠는가?”하고 사양하여 듣지 않으시매 그 후에 이상공(李相公)이 문인(門人)을 보내어 재삼 간청하매 님께서 부득이 이를 쫓아서 이공의 집 글방에서 五~六년을 지내시었다. 그리고 이상공(李相公)댁의 시랑 김현(侍郞金鉉)이 또 그 아들을 부탁하매 김시랑의 집에서도 지내는데 서울의 명문대가 자질(子姪)들이 많이 와서 배우게 되매 님께서는 재주가 얕고 깊음을 헤아려서 순순(循循)이 가르쳐서 차례가 있게 하였고 아래로 상노(床奴)와 가마 매는 사람(臺輿)에 이르러서도 은화하게 대하지 않음이 없으시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잘 따랐다. 승선(承宣) 이정우(李鼎愚)가 영변부사(寧邊府使)를 지낼때 님께서 필마(疋馬)로써 찾게 되었다. 관서(關西:평안도)지방의 산천을 유람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공(李公)이 노잣돈으로 二만량을 주었다. 이에 님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천리 길을 내가 온 것이 돈을 받으러 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물리치고 받지 않았는데 이공이 중로(中路)로 사람을 보내 여관 종에게 모두 맡겨주고 갔다. 헌종 무신년에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시매 이로부터 태학(太學)에 계신지가 수십 년에 삭지(朔紙)로 옛글과 역사를 베껴서 쓰신 것이 상자에 가득한데 글자 획이 정교하고 굳세어서 모두 후손의 가보가 되고 있다. 정사년 봄에 죽동(竹洞;지금 河川面 竹東里) 시골집으로 돌아오시니 담장이 허술해져서 겨우 비바람을 가리게 되었다. 이에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으셨고 서적으로써 스스로 즐기시니 이웃 고을 선비들까지도 다투어 와서 공부하매 항상 효도와 공경의 도(道)로써 힘쓸 것을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히 본을 받았다. 님께서는 언제나 청빈(清貧)하였으되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였고 아무리 가난해도 일찍이 남에게 빌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혼자 계실 때에도 또한 얼굴을 흐트러지게 함이 없이 반드시 의관(衣冠)을 단정히 다스려서 남과 상대하여 앉으신 것 같았다. 남의 잘한 것을 보면 내 일같이 기뻐하였고 남의 잘못을 들어도 면대하여 책망하지 않으시매 일가와 온 마을이 모두 그 높음에 감복하고 그 덕을 사모하였고 거처하시는 곳은 언제나 물 뿌리고 정성껏 맞아 주시매 항상 강절(康節)선생이 움집에서 사시던 풍모가 있으셨다. 기사년 겨울에 친상을 당하여 묘를 구하게 되었는데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 곳의 이씨네 묘소 뒤가 옛 부터 유명한 곳이라”하니 님께서 말하기를 “사람이 자리를 가려 어버이 장례를 모심은 영혼을 평안케 하려함인데 만약 다투어 소송할 곳에 장례 모신다면 도리어 어버이의 유골에 욕을 보여 드리는 것이니 그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하시매 그 사람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효자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三년상을 사시매 언제나 허리띠와 머리띠를 벗지 않았고 몹시 춥고 무더운 여름과 바람이 강하고 큰비가 오더라도 조석으로 반드시 묘소에 가서 애통하여 하늘에 울부짖으시니 길의 행인들도 모두 말하기를 “이것은 印효자의 곡성이라”고 하였다. 선대에서 심은 나무에 이르러서도 비록 몸통이 썩고 덩굴이 말라 죽어도 감히 가지 치거나 베이지 않으시고 사랑하고 공경하셨다. 선조 한림학사공(휘邠)의 묘소가 남녘 함창(咸昌)에 있으신데 님께서 천리 길을 발을 걷고 물을 건너서 성묘(省楸)하시고 사초(改莎)도 하고 위토(祭田)도 사서 주었으며 또 항상 인씨가 숫자가 적고 보첩이 없어진 것을 탄식하사 드디어 여러 일가에게 주창하고 권하여 세계와 수단(系單)을 수합하고 돈을 거둬 간행하시니 이것이 병술과 갑자보로서 四十년 사이에 두 번이나 보첩을 중수하시매 님께서 모두 그 일울 하셨으니 선대를 위하고 일가를 위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의 유무를 불계하시고 반드시 정성을 기울이신 것이 이와 같이 많으셨다. 나이가 팔순에 가까워서도 선조를 받듦이 더욱 독실하사 항상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집안의 사당을 뵙고 선조의 제삿날을 맞으면 三일을 목욕재계하셨으며 몸소 제사를 지내시매 신병으로써 거르지 않으시었다. 일찍이 훈계를 남겨서 말씀하시기를 “일후에 자손들이 만약 고을살이를 하게 되어 그 행실에 티가 생기게 되거나 남의 말에 현혹되어 선대 묘소를 이장하는 것은 우리 집안의 전해오는 법이 아니니 너희들은 그리 알고 힘쓰라”고 하셨다. 님께서는 정조 병오년 九월 초二일에 나시어 금상(今上:지금 임금 즉 고종)三년 병인 三월 十九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八十一세요 경향의 친들이 듣고 실성(失聲)하여 탄식하기를 “군자(君子)가 갔도다”하고 많은 제문(祭文)과 만장을 지어서 곡하였고 부의와 보낸 제물이 많았다. 이해 九월 초五일에 보령산 아래 신좌에 처음 모셨다가 四년이 지난 기사년 十월 초九일에 그 산 아래 기슭 해좌에 길이 모시게 되었다. 배위 밀양손씨는 학생 상률(相律)의 따님이시니 맑고도 근신한 덕이 있으셨고 一남七녀를 낳으시매 아드님 범석(範錫)께서는 효행으로 동몽교관의 증직이 있었고 일곱 따님은 연안(보관 이하同) 김용(金鎔)、인천 채경석(蔡京錫)、한양 조기복(趙基福)、부안 김무희(金武熙)、밀성 박원진(朴元鎭)、온양 정안교(鄭安敎)、파평 윤학상(尹學成)에게 시집가셨다. 손자는 영철(永哲)이요 증손은 동식(東植) 병식(丙植)이다. 슬프도다! 우리 님(府君 :즉 증조부님)께서 천품이 온화하시고 덕망이 휼륭 하시어 사물로써 다툼이 없었고 젊어서는 문학을 익히사 명성이 세상에 들리시었고 중년에는 또 힘을 옛글에 쏟으사 지으신 글이 많으셨으나 남에게 칭찬을 꺼려 원본을 버리고 거두지 않으셨으므로 집안에는 전해오는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슬프고 애석하도다. 군수 유진일(兪鎭一)이 항상 사람에 일러 말하기를 “젊어서 인죽계 선생을 경성에서 뵈었는데 수염과 눈썹이 빛나게 맑고 모습과 의관이 단아하여 바라보매 큰 그릇임을 알았다”고 하였고 나에게는 말하여 이르기를 “군들은 명문의 후손으로 장차 국가에서 쓰게 되리니 어찌 힘써 배우지 않고 허송세월 하느냐?”라고 하시어 내가 항상 들을 때마다 송구하여 땀이 났으니 죽계께서는 가히 선배의 풍모가 있었다고 이를만한 것이다. 상서(尚書:판서) 심승택(沈承澤)이 말하기를 “죽계는 고매 단아하고 학식이 넓어서 가히 옛날의 황헌왕통(黃憲王通)에게 비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두 분들의 말을 보더라도 가히 님의 평소의 대개를 알겠고 또한 족히 후세의 정평이라 하겠다. 불초가 七세에 비로소 입학하매 님께서 손수 천자문을 베껴 주시고 책 뒤에 쓰시기를 “내가 이제 나이가 七十九인데 이것을 써서 증손에게 주노라”고 하셨는데 증조부님의 손때(手澤)가 지금도 오히려 새롭다. 이제 불초가 나이 三十이 넘었으나 배움이 아직도 방향을 알지 못하니 님의 유적을 받들어 보매 눈물의 아름만 간절하다. 삼가 님께서 사실 때의 행적 중에서 듣고 본 것을 적어서 행장을 만들어 보는 자손에게 보게 하노라. 서기 一八九○年 庚寅 三月二十日 不肖曾孫 東植 泣血 謹書